중학교 3학년 때, 우리 반에 엄청 잘생긴 친구가 있었다. 뚜렷한 이목구비에 짙은 쌍꺼풀, 키는 나랑 비슷했지만 왁스로 멋있게 세운 헤어스타일은 평범한 나와는 달랐다. 서면 밀리오레에서 산 보세 스키니진을 입고 흰색 하이탑 신발을 신고 다니던, 온갖 멋있는 것이라곤 다 가지고 있던 그 녀석을 어쩌면 나는 처음부터 동경했던 것 같다. 왠지 느껴지는 거리감에 처음에는 데면데면하다가, 당시에 내가 다니고 있던 종합학원에 그가 등록하게 되면서 우리는 어쩌다 보니 꽤나 친해졌다. 밤늦게까지 학원에서 녀석과 함께 공부하고, 피씨방에 가고, 축구를 하면서 언젠가부터 나도 걔처럼 되고 싶어졌다. 그래서 엄마가 사주시던 옷을 거부하고 처음으로 주머니에 10만원을 넣고 남포동으로 보세 옷을 사러 떠나던 길이 기억난다. 그때는 네이버 지도나 카카오맵도 없었는데, 멋진 옷을 갖고 싶다는 일념으로 멀리 버스를 타고 가던 나의 모습은 꽤 용감했던 것 같다.
하여튼 멋있는 친구와 같이 다니고, 따라하면서 내가 그 친구처럼 멋있어지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이것저것 많이 배우게 된 것 같다. 처음으로 패션에 대해 생각해보았고 (대학에서 여자친구 사귀는데 도움이 됐다), 처음 왁스를 발라봤고 (가늘고 힘없는 모발에는 왁스를 바르면 안된다는걸 깨달았다), 외고 준비를 하던 그 친구 따라 공부를 열심히 했다 (나는 떨어졌고 그는 붙었다). 고등학교를 달리 진학하게 되면서 그 친구와는 자연스레 멀어졌지만, 황새를 따라가려고 다리를 찢었던 뱁새는 그나마 유연한 뱁새가 되었다.
패배감이 생길 법 하지만, 나는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내 모습이 달라지는 것이 보기 좋았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항상 내 마음속에는 일방적 라이벌을 설정해놓고 가상의 경쟁을 펼치고 있는 것 같다. 거의 대부분의 경쟁에서 상대도 안될지라도, 라이벌의 존재가 주는 경각심과 불안함은 나름 괜찮은 동력이 된다.
“제 성취는 불안감 덕분”
- 건축가 유현준 교수
나도 유현준 교수의 말에 어느정돈 공감할 수 있을 것 같다. 뭔가 정체되어 있으면 불안한 느낌. 아직은 젊기에 이 느낌을 이용해서 발전하고 싶다.
엊그제, zzsza 변성윤님의 블로그에 2021년 회고글이 올라왔다. 참 부지런한 분이다. 매년 자신을 돌아보며 방향을 재설정하는 그의 모습이 멋있다. 이 블로그의 과거 글부터 하나씩 읽어보면, 그의 성장 과정과 노력이 엿보인다. 블로그 글도 하나하나 짧은 컨텐츠가 아니라 본인의 공부 과정을 기록하는 느낌으로 길~다. Post라기 보다는 Chapter같은 느낌이랄까? 스타트업에서부터 열심히 성장해서 지금은 SOCAR에서 열일하고 계시는 그 분도 내 라이벌 목록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따라쟁이 나도, 그를 따라서 지난 날들을 돌아보려고 한다.
요즘 생각들
조직의 성장과 개인의 성장
- 입사 당시(2019년) CTO님을 제외하고 3명이었던 AI R&D팀은 이제 13명의 규모가 됨. 팀은 그룹이 되었고 나는 선행기술연구개발팀에 소속됨.
- 처음에는 팀이 진행하고 있던 프로젝트의 마무리를 맡음.
- NLP 프로젝트를 진행했고, 문단 사이즈의 텍스트를 분류하는 모델 개발.
- 그 전까지는 Vision 모델에 대해서만 알고 있었는데, NLP도 열심히 공부하게 되면서 딥러닝을 조금 더 넓은 시야로 볼 수 있게 됨.
- 회사에서 내부적으로 사용하고 있던 형태소 분석기를 이용할 수 있었음!
- Random Forest부터 BERT까지 다양한 모델을 현업에 적용해볼 수 있었음.
- 그 사이 Vision Transformer가 나오고 Vision 쪽 SOTA 모델도 NLP에 쓰이던 Transformer류가 장악해가는 것을 목격.
- Vision, NLP, Audio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것을 느낌.
연구
라는 필드에서 내가 의미 있는 성과를 낼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생김. Bleeding Edge를 따라가기도 벅찬 것 같음.개발
에 집중.
- 회사에서도 NLP와 Vision을 섞으려는 시도가 생김. 꽤 규모가 있는 OCR 프로젝트를 시작.
- OCR 프로젝트에서 주도적 역할을 수행.
- 데이터 생성을 위한 GUI 저작도구를 개발하고 OCR을 실제 수행하는 서버 어플리케이션 제작.
- 후속 프로젝트에서는 공문서 OCR 모델 개발 주도함.
- 2021년에 나온 Swin-Transformer 적용하여 SOTA급 결과 도출함. 뿌듯.
- 절박함이 없으면 성장이 없다.
- 몇가지 프로젝트가 들어오면서 그룹의 매출이 넉넉해지다보니 팀내 여유가 많이 생김.
- 처음에는 좋았으나 계속된 긴장감 상실은 팀원들의 성장을 저해하는 결과로 이어지는 것 같음.
- 나는 블로그나 친구들과 팀 프로젝트를 통해 뭔가 해야겠다는 생각에 빠져있었고, 팀원들은 무언가 회사일과 관련하지 않은 분야의 논문을 쓰기 시작함.
- CTO님이 매니저 두 분을 영입하셨고, scrum과 sprint가 도입되면서 새로운 feature를 배우고 적용해보는 기회가 다시 생겨나고 있음. 긍정적.
- zzsaz님이 언급한 Dropbox Engineering Career Framework처럼, 성장 경로 대해 정의하고 구성원의 성장을 독려하는 체계가 갖추어지는 것이 정말 중요한 것 같다.
성장하고 있다는 느낌
- 조직이 공인하는 Engineering Career Framework이 없는 경우, 나의 커리큘럼을 내가 설정하는 것은 정말 중요한 일.
- 무턱대고 다른 조직의 Engineering Career Framework를 따라 레벨업을 시도해보는 것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단 분명 낫겠지만, 혼자 하다보면 중간에 김이 빠질 확률이 높을 것 같다.
정체=불안
인 나에게 뭔가 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속적으로 받는 것은 중요하다.- 2020년에는 팀 프로젝트였고, 2021년에는 논문 구현과 Github이었다.
- 사업 구상을 하며 딥러닝 Audio 분야 논문도 읽고 openspeech코드도 많이 뜯어봤다.
- 그래도 혼자 공부하고 끝나는 것 보다는 뭔가 기록으로 남는게 중요한 것 같다. 블로그 포스트라도 남기고, 하다못해 Github profile에 commit 내역이라도 남기고.
- 가끔은 이런 불안이 스트레스로 다가올 때도 있다.
- 명상으로 달래거나 내 Repository에서 별거 아닌 결점이라도 찾아서 수정 후 commit한다. (commit map에 초록색 점이 박히는게 그래도 위안이 된다.)
팀 프로젝트
- 공교롭게도, 회사에서 OCR 업무를 시작하기 전에 친구들과 OCR 관련 프로젝트를 했었다. 결과적으로는 흐지부지 됐지만 좋은 기억.
- 회사에서 정해진 업무를 하는 것 외에도 내가 기획하고, 개발하고, 서비스해보는 경험이 재미있었다.
- 개발은 많이 할수록 는다. 그리고 기존에 하지 않던 개발이 실력 향상에 더 도움이 되는 것 같다. 그리고 그 경험은 다시 어딘가에 쓰인다.
- 내년에 기회가 되면 새로운 프로젝트도 해보고 싶다. Audio 관련해서. 목표는 모바일 어플리케이션으로 서비스하는 것 까지.
건강
- 퇴근하고 나서 짬내서 계속 팀 프로젝트 관련 개발을 하다 보니 제대로 휴식을 가지기 어려웠다. 장거리 부부라서 주말에는 항상 배우자에게 집중해야 했고.
- 그러다보니 퇴근 후, 팀 프로젝트 일을 하면서 맥주를 마시거나 팀 프로젝트 스케줄이 없는 날에 혼술을 하는 날이 잦아졌음.
- 올해 건강검진에서 콜레스테롤 수치가 매우 높게 나옴
- 즉시 술을 끊고 건강식으로 먹고는 있는데, 검진 결과가 꽤 충격적이라서 뭔가 인생에 회의감이 들고 있음.
- 왠지 모르게 심장쪽이 뻐근한 느낌이 드는데, 병원에 가보니 아무래도 심리적 요인인 것 같음
- 역시 건강이 제일 중요하단 말이 확 실감되는 요즘.
공부
- 언제까지 공부를 계속 할 수 있을까? 재밌어서 하는 것인지 살아남기 위해 하는 것인지 헷갈릴 때가 많음.
- 공부의 도메인이 꼭 Computer Science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기로 함. 근래에는 경제 공부를 오히려 더 많이 하는 것 같기도 하고.
- 그래도 도메인과 상관 없이 하루에 읽어내는 텍스트의 양은 점점 많아지는 것 같음.
- 내년에는 스타트업 관련한 정보들을 많이 접하고 싶음. 현재는 Platum에서 관련 기사 정도만 읽고 있음.
습관 관리
- 운동하기, 명상하기, 물마시기 등의 습관 관리가 잘 안됐다. 머리 속에서만 생각하고, 업무 중 중요한게 더 많다보니 내가 영양제를 오늘 먹었는지 어제 먹었는지도 기억 못하는 때가 가끔 있었음.
- Streaks 어플리케이션으로 관리 중.
- 지금은
운동하기
,물마시기
,명상하기
,책읽기
,금주
,건강한 식사하기
여섯가지를 관리 중인데, 내년에는 조금 더 늘리고 싶음. - 하루 15분간 책 읽는 시간을 지정했던게 도움이 많이 됐다. 덕분에 올해도 책은 몇권 읽었다.
근데 Books는 왜 비어 있나.. - 한동안 아침에 일어나서 10~15분씩 명상했었는데 바빠지면서
(핑계)못했었음. - 커뮤니티에서 Balance 어플리케이션 1년 무료 프로모션을 발견하고 다시 시작했는데 꽤 좋음. 추천.
- 가끔하는 건 도전. 꾸준히 하는게 습관.
여행
- 2021년 내내 떠올리며 하루하루 삶의 원동력이 되던 깃발이자 목표!
- 아내와 2022년 2분기부터 Gap-Year를 가지기로 함.
- 약 1년동안 지구 한바퀴 돌 예정!
- 바쁘게 여행지 정하고, 공부하고, 계획 세우면서 스트레스도 풀고 심심할 틈이 없었음.
- 조사한 자료들을 Notion에 정리하면서 Notion에서 제공하는 기본적인 Text Editting 기능을 넘어서서 Database기반의 고급 기능들을 자주 쓸 수 있었음. 자료들이 꽤 체계적으로 정리되고 있음. 여행하면서 workspace를 충분히 완성하게 되면 이걸 판매하거나 수익화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볼 예정.
- 여행하면서 유튜브 채널도 운영할 생각. 채널명은… 미정
- 커리어적으로 몽땅 비어버리는 한 해를 보내기는 조금 걱정이 된다.
-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되길.
인스타툰
- 그림 전공한 처제를 이용(?)해서 우리 부부의 인스타툰을 만들어보고 있음.
- 간단한 시놉시스를 그려서 전달해주면 처제가 예쁜 그림으로 그려줌.
- 1주에 1개의 게시물을 올리는게 목표인데, 체계가 안잡혀서 생각보다 오픈이 늦어졌음.
- 일상툰 형식으로 우리 일상의 에피소드들을 기록하는게 목표인데, 이왕이면 나중엔 소소한 수익도 발생하면 좋을 것 같음.
- 오리와 다람 (Ori & Daram) 팔로워 많아졌으면 좋겠음.
정리
- 2019년, 2020년에 따로 정리를 안했던 탓에 2021년 정리에 애매하게 끼워넣었는데 생각보다 분량이 많지 않음.
- 2022년에는 아마 많은 일들이 벌어질 예정이라 설레고 기대되는 내년.
- 본의 아니게 디지털 노마드로 발전할 수 있는 분야를 전공하고, 업으로 삼고 있음에 감사.
- 빠르게 성취하지 못하더라도 천천히, 내가 생각하는 방향으로 인생을 주도하는 것이 내 목표.
- 닥터 스트레인지가 봤던 1400만개의 미래는 몬테 카를로 방식이였을까?
- 나는 석사니까 14개 정도의 미래는 보려고 노력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