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복되는 업무에 스트레스를 받던 차, 아내와 리프레시를 목적으로 2021년 2월, 2박 3일 짧게 다녀온 제주 여행을 기록합니다. 작년에 신혼여행으로 마지못해 다녀왔던 제주에서의 추억이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만족스러웠기에, 다시 찾아오게 되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여행을 계획할 때마다 거들떠보지도 않던 제주였는데, 이렇게 좋은 여행지라는 것을 이제라도 알게되어 다행입니다.


비행

코로나 시국에 잘 타기 힘든 1시간여 비행에서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바라보며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좁은 좌석에 등을 기대고 떠오르는 생각들을 휴대폰에 적어봤습니다.

비행기-창밖풍경

울퉁불퉁한 지형 사이사이에 빼곡한 아파트와 건물들에서 인간을 느낀다. 비행기는 빠르게 날아가며 질서가 보이지 않던 마을들에서 네모 반듯하게 조성된 깨끗한 시가지의 모습까지 골고루 보여준다. 엊그제 내린 눈이 미처 말끔히 녹지 못한 지상은 회색 콘크리트를 수줍은 듯 간신히 가려내고 있다. 작은 창문이 더 높은 곳으로 이동할 수록 땅에 떨어진 레고 조각처럼 초라해 보이는 아파트들은 한동안 열심히 청약 정보를 검색하던 나를 무안하게 만든다. 다닥다닥 붙다 못해 아래위로도 층층히 쌓여서 오들오들 떨고 있는 인간은 대단히도 추운 존재인가보다.

나도 저들 사이로 비집고 들어가 추위를 참아내는게 맞는걸까? 나는 어떤 인생을 살고 싶은가. 생각해보면 나는 그냥 더 따뜻한 남쪽으로 떠나고 싶은 것 같다. 어쩌면 나는 그냥 조금 더 쉬운 인생을 살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렌트

셔틀버스정류장

제주 공항에 내려 렌트카를 수령하려 셔틀버스를 타러 갑니다. 지난번 왔을 때처럼 아주 화창한 날씨는 아니지만, 왠지 모를 해외의 느낌이 묻어있습니다. 여행온 기분이 납니다.

이 시국에 여기저기 관광하러 다니기는 민폐처럼 느껴져서 식사를 제외하곤 최대한 군중이 모이지 않는 곳으로 다니기로 했습니다. 제주의 예쁜 드라이브 코스를 운전하고, 뷰가 좋은 곳에 차를 세워놓고 아내와 이야기를 나누는 방식의 여행 테마를 잡았습니다. 사실상 자동차 여행이라, 어떤 자동차를 렌트할지가 중요했습니다. 신혼여행 때 큰맘먹고 테슬라 모델3를 렌트했는데, 그 경험이 꽤 즐거웠어서 이번에도 같은 차량으로 렌트하기로 했습니다. 처음 렌트할 때는 걱정이 앞서, 고객부담금이 완전 면제되는 슈퍼완전자차 보험을 들었는데, 이제 한번 운전해봤다고 보장 한도가 있는 일반 완전자차로 보험을 변경하니 렌트 비용도 절반이 되었습니다.

렌트한 모델3는 FSD(Full Self Drive) 기능은 빠져있었지만 라인 트레이싱과 앞차 간격을 비롯한 기본적인 자율주행 기능만으로도 충분히 인상깊습니다. 인공지능 개발자로서, 상용 제품에, 그것도 자동차에 이런 기술을 탑재할 수 있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이슈가 많은 인테리어와 단차의 경우에도 원래 타던 자동차가 소형차라 그런지 그렇게 허접해보이지 않고 전체적으로 아주 만족스러웠습니다.

테슬라는 별도의 어댑터가 없으면 제주의 모든 충전 인프라를 이용할 수는 없습니다. 전기차 충전소에 따라 어댑터의 종류(차데모, DC콤보 등등)에 차이가 있는데 렌터카 업체에서 지원하는 어댑터의 종류에 따라 이용할수 있는 곳도, 없는 곳도 있어 확인이 필요합니다. 여행중에 틈틈히 충전하기는 꽤 스트레스가 됩니다. 테슬라 모델3 스탠다드 레인지 플러스는 완충시 350km정도를 주행할 수 있습니다. 제주는 하루종일 운전해도 300km 운전하기 힘듭니다. 만약 숙소에 충전소가 있어서 자는 시간동안 완충이 가능하다면, 하루종일 충전소 찾을 필요는 없을겁니다. 그래서 이번 여행에서는 테슬라 전용 충전소인 데스티네이션 차져를 이용할 수 있는 제주 신라스테이에 숙소를 잡고 충전 스트레스를 제거하는 플랜으로 계획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성공이었습니다!

IMG_7756
전자기기 같은 테슬라


드라이브 코스

숙소보다 렌트 비용이 더 비쌌으니 차에서 내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IMG_7940.JPG

IMG_7998.JPG

IMG_8128.JPG

한라산 능선을 타고 숲속을 주행하는 1139번 도로와, 탁 트인 시야에서 느긋하게 주행할 수 있는 1115번 도로는 드라이브하기 딱 좋습니다.


오름

언덕 정도밖에 안돼보여도 올라가면 시야가 탁 트이는게, 산에 비해 쉬워서 좋습니다.

IMG_8130.JPG

IMG_8218.JPG

IMG_8149.JPG

가져갔던 드론도 날리고, 아내와 서로 사진도 많이 찍으며 재밌게 놀았습니다.


식사

한치 앞도 모를 바다

IMG_7799.JPG

한치 앞도 모를 바다. 멋진 이름의 해물 떡볶이집입니다. 아내가 좋아해서 지난 제주 방문때도 찾아왔지만 그땐 휴점이라 맛을 못봤었는데, 이번에는 기회가 닿아 자리에 앉을 수 있었습니다. 자그마한 매장에 아기자기한 소품들이 있습니다. 아내의 추천으로 문어 차돌 떡볶이를 주문했는데, 매콤해서 약간 땀이나긴 했지만 역시나 참 맛있었습니다. 약속된 맛을 보장하는 차돌박이와 그 위의 문어가 매력적이었어요. 맛있는 떡볶이집이 많은 제주에서 오랜시간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를 검증하고 온 기분입니다.

흑돼지

저는 돼지고기를 정말 좋아하지만, 제주 흑돼지에 대해서는 별로 큰 감흥이 없습니다. 특별히 맛있는 돼지라기 보다는 바가지 쓸 수 있다는 걱정이 먼저 드는 메뉴입니다. 차라리 지리산 흑돼지나 그 돈으로 미국산 소고기를 먹는 것이 더 나을 수 있다는 생각도 합니다. 하지만, 제주 흑돼지라는 그 상징성 하나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난번 제주 여행에서 흑돼지를 의도적으로 무시했던 것이 괜히 미안해서 이번에는 한끼 식사로 흑돼지를 끼워주기로 했습니다.

들어갔던 식당은 규모가 거의 기업 수준이었습니다. 도시에 있는 가족외식점의 크기였고, 직원들분들도 많은데다 매우 분주해보였습니다. 멜젓이 나오는 상차림은 제주 스탠다드였던 것 같습니다. 고기는 적당히 맛있었던 것 같습니다. 고기에 소주 한잔이 빠질 수 없어, 한라산도 한 병 같이 곁들어서 혼자 홀짝거렸습니다. 차를 가져와서 아내와 함께 마실 수 없음이 아쉬웠습니다. 먼저 마시기 시작했던 술에 취했는지, 고기가 익어도 사진 한 장 찍지 않았네요.

식사가 끝나갈무렵 아내의 시선이 제 뒤편의 테이블로 고정되어 있길래 뒤돌아보니 어떤 아주머니가 고기를 구우시는데 숯불에 불이 붙어서 화염이 꽤 높이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주변을 지나가던 직원분이 그걸 보고는 (왜 그러셨는지 모르겠지만) 환기용 후드를 불 위에 올리고 흡입구를 더 열어서 불길을 후드 안으로 집어넣으셨습니다. 그러자 후드 전체에 불이 붙어 순식간에 공기 통로가 다 타버리고 후드가 떨어졌습니다. 불이 후드만 태우고 더 크게 붙지는 않아 천만다행이었습니다. 제 바로 뒷 테이블이었는데, 깜짝 놀라 얼른 계산하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맛있는 고기와 알딸딸한 소주 한잔의 경험은 그렇게 의도치 않은 불쇼에 묻히고 말았지만, 제게는 꽤나 임팩트 있는 경험으로 남을 것 같습니다.

상춘재

IMG_8336.JPG

청와대 주방장 출신 주방장의 요리를 맛볼 수 있는 곳이라하여 기대를 듬뿍하고 찾아갔는데, 정말 만족한 곳이었습니다. 입에만 단 음식들을 먹다가 정말 제대로된 “요리”를 대접받는 기분이었습니다. 메뉴는 평범한 비빔밥이었지만 간도 적절하고, 다채로운 반찬들이 참 즐거웠습니다. 먹는 내내 꼭 부모님을 모시고 한번 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보말 칼국수

IMG_8397.JPG

한번도 먹어본적이 없는 음식이었습니다. 뭔가 미역국 베이스에 칼국수를 올려놓은 것 같은 음식입니다. 제주도 지역 음식이라는 것과 왠지 건강해보인다는 것이 가산점이 크게 작용하는 것 같지만, 맛도 삼삼하니 아주 좋았습니다.

해장국

IMG_8090.JPG

제주 해장국이 또 그렇게 맛있다는 소식에 국밥류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안가볼 수 없었습니다. 얼큰하고 시원하고 제주 해장국은 좋은 해장국이었습니다. 꽤 유명하다는 집에 들어갔던 것 같은데 상호가 기억나지 않는게 제일 아쉽습니다.


이야기

2월에 다녀왔던 여행을 11월에 정리하려니 사진 말고는 남아있는 기억이 많지 않습니다. 그래도 음식들의 사진을 보며 맛을 묘사하려 애쓰니 그 메뉴들의 끝맛이 혀에 맴도는 것 같습니다. 곧 해가 바뀌면, 해외로 나갈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훨씬 다양하고 많은 경험들을 할텐데, 여기 블로그에 더 친근한 방식으로 기록해볼 생각입니다. 이렇게 오래 기억을 방치하지 않고요.

이번 포스트의 제주 여행은 올해의 처음이자 마지막 여행이었는데, 정리하다보니 내년의 여행이 더욱 기다려집니다.